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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는 경기도의 북서쪽에 위치하여 남동으로 서울과 접하고, 북동으로 양주시, 북서로 파주시, 남서로는 한강을 끼고 김포시와 인접해 있습니다. 지리적 위치를 살펴보면 동쪽 끝은 덕양구 효자동, 서쪽 끝은 일산서구 구산동, 남쪽 끝은 덕양구 덕은동, 북쪽 끝은 덕양구 벽제동으로 2017년 12월 31일 기준으로 인구는 408,816세대 1,041,983명입니다.

 

고양시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 시대, 삼국~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근현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구석기시대로, 옛송포면 일산읍지역에서 찍개, 끌개, 몸돌 등의 설기류가 발견되어 적어도 5만년 이전부터 고양시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촌초등학교 지역, 성저마을과 같은 일산신도시 지역에서 토기 및 4천 4백 60년전 것으로 판정된 볍씨, 나무 열매 등과 같은 신석기 시대 농경 생활 및 자연환경을 알 수 있는 유뭉리 출토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곡릉천, 창릉천, 원당천, 장진천 등 하천에 따라 펼쳐진 언덕진 곳에서 발견이 되고 있으며, 문봉리, 화정리 지역의 지석묘군, 성사리출토 동모용범편 등이 있다고 합니다.

고양지역이 선사시대에 이러 역사무대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백제가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고대 국가로 건국 성장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서기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의 수도성을 함락시킨 이후 고양지역이 고구려 영토로 귀속되었고, 고구려는 고양지역 내에 달을성현과 개백현을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그 뒤 신라 진흥왕 16년에 북한산에 순수비를 세웠으며, 고양지역에서 북한산주를 설치하여 군사적 요지로 삼았다고 합니다. 또한 통일 신라시대에 고양지역은 한산주에 소속되었고 달을성현을 고봉으로 개백현을 우왕으로 개칭하였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태조 23년에 우왕현을 행주로 바꾸고, 별호로 덕양이란 명칭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종 9년에는 고봉현과 행주현 두 현을 양광도의 양주에 속현으로 예속시켰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인 태조 3년에 고봉감무를 설치하고 부원현과 옛 일산읍 주엽리 일대인 향조향을 고봉현에 예속시키므로써 속현이 아닌 지방관이 파견되는 지위로 승격이 되었었다고 합니다. 태종 13년 현의 명칭을 고봉과 덕양 두현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고양현이라 바꾸었고, 성종 원년에 현에서 군으로 숭격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연산군 10년 지언, 이오을, 미장수 등이 국왕을 모독했다는 죄로 처벌당하면서 죄인이 살던 곳이라하여 혁파되었다고 합니다.

개항이후 현재까지의 고양은 근대적개혁의 일환으로 지방행정제도가 자주 변화하면서 고양군의 소속이 여러차례 바뀌었습니다. 1914년 고양군은 12개면(용강, 연희, 은평, 숭인, 독도, 한지, 벽제, 신도, 원당, 지도, 송포, 중면) 155개 리로 구성되었고, 고양군청은 지금은 충정로 1가로 이전하였다고 합니다. 1936년 용강면, 연희면, 한지면이 한성부로 편입되고 고양군청은 지금의 동대문 부근인 을지로 5가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1945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서울시 행정구역 팽창에 따라 일부 면이 서울시에 편입되어 고양군은 원당, 백제, 신도, 지도, 송포, 중면의 6개면만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1961년 8월 군청을 서울시에서 원당면으로 옮겼고,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벽제, 지도, 화전, 일산, 원당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능곡, 원당, 일산을 중심으로 도시화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1989년 4월에 일산신도시 건설계획이 발표되면서 옛 일산읍 일산리, 마두리, 장항리, 백석리, 주엽리 일대에 560여 만평의 일산 신도시 건설이 시작되었고 이어 중산, 탄현, 성사, 화정, 능곡, 행신지구의 택지개발지구가 추가로 발표되면서 마침내 1992년 2월 고양시로 승격되었다고 합니다.

 

상기 내용은 고양시청 홈페이지 내용을 발췌한 것으로, 더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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