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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에 위치한 서오릉은 2009년 6월 26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 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유네스코는 서오릉, 서삼릉을 비롯한 조선왕릉이 유교적, 풍수적 전통을 근간으로 한 독특한 건축과 조경양식으로 세계유산적 가치가 충분히 인정되며 지금까지 제례의식 등 무형의 유산을 통해 역사적인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는 점, 조선왕릉 전체가 통합적으로 보존관리되고 있는 점 등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또한 한 문화재 한 지킴이, 전주이씨대동종악원 등과 같은 사회, 지역 공동체의 참여에 의한 보존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합니다.

서오릉이란 조선왕조의 다섯 능 즉 덕종과 소혜왕후의 능인 경릉,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능인 창릉,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의 능인 익릉, 숙종과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능인 명릉, 정성와후의 능인 홍릉이 모여 있어서 일컫는 명칭입니다. 서오릉 지역이 왕실 묘역으로 선택된 이유는 세조 3년에 세자 덕종이 사망하자, 풍수지리설에 의해 경릉을 쓰고부터라고 합니다. 서오릉에는 이 5개의 능 외에도 조선왕조 최초의 '원'으로 명종의 첫째 아들인 순회세자의 무덤인 순창원과 숙종의 추궁으로 많은 역사적 일화를 남긴 희빈 장씨의 대빈묘가 있습니다. 서오릉은 구리시의 동구릉 다음으로 큰 면적의 조선왕조 왕실의 가족무덤이며 고양시청에서 서울시 은평구 갈현동으로 이어진 55번 지방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457년 세조는 원자였던 덕종이 죽자 길지를 물색케하였고, 서오릉터가 길지로 간택되자 세조가 직접 답사하여 경릉터로 정하여 서오릉의 조성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경릉은 세조 때부터 시행된 동원이강식의 쌍릉입니다. 특이한 점은 보편적인 왕릉 조성과는 달리 왕은 오른쪽, 왕비는 왼쪽에 봉분이 조성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왕비의 능이 왕의 능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화려하여 왕과 왕비의 능을 혼동하게 할 여지가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조성된 원인은 덕종은 예종의 형으로서 사망 당시 왕이 아닌 대군이었고 게다가 세조가 능제간소화정책을 추진하던때라 덕종릉은 난간석, 망주석이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혜왕후릉은 남편이 덕종으로 추존된 뒤 조성되었으므로 왕릉의 예를 따라 왕비의 릉이 왕의 릉보다 훨씬 화려한 것이라고 합니다.

 

창릉은 조선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능입니다. 석물의 배치는 여느 능제와 같이 국조오례의에 따라 조성했는데, 고석에 고리모양을 세기고 팔각장명등의 지붕돌 상륜부에 있는 연잎 등 개성있는 조각미가 보입니다. 예종은 경릉에 있는 덕종의 동생인데, 형이 죽은 뒤 세자가 되어 1468년 9월에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14개월만에 사망하였습니다.

 

익릉은 19대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의 능입니다.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하여 홍살문에서 시작되는 참도가 큰 계단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익릉의 특징은 숙종의 능제 간소화정책이 내려지기 전 무덤이면서 임진왜란 이후의 변형된 양식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대한 석물과 팔각장명 등은 그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명릉은 19대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2계비 인원왕후의 능입니다. 원래 인원왕후는 명릉에서 400여 보 떨어진 언덕에 자신의 자리를 잡아두었는데 영조가 현재의 위치에 능을 썼다고 합니다.

 

홍릉은 정성왕후 서씨의 능입니다. 영조는 그녀를 무척 좋아했는데 생전에 옆자리에 누울 예정으로 자신이 안치될 정혈에 십자를 새긴 돌을 묻어두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손자인 정조는 구리시의 동구릉에 있는 원릉에 할아버지를 묻었고, 그래서 정성왕후 서씨의 오른편은 영영 비어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양시 홈페이지 내용을 발췌한 것으로, 더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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