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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후 270년이나 방치되어 있던 경복궁은 1868년에야 중건되었는데, 경복궁 중건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오랜 세도정치로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진행했던 것이라고합니다.
조선을 향한 서구 열강의 끈질긴 개항 요구와 침입이 있었고, 조선은 프랑스군과 미국군이 침입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격퇴하기도 했지만 결국 1876년 부산·인천·원산 등의 항구를 개방했고 서구 열강과 조약을 맺었다고합니다. 당시 조약 내용을 보면 관세 주권에 제한을 두는 등 불평등한 내용이 많았다고합니다. 이에 따라 조선의 상권이 외국 상인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일이 많아지고 일반 서민의 생활이 곤궁해졌다고합니다. 일본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승리하고 대한제국의 금융과 재정을 장악하면서 조선 상인들의 몰락이 가속화 됐지만 국채보상운동, 식산흥업운동, 근대교육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조선의 상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끊이지 않았다고합니다.

 

1870년대 중반 무렵 한성의 젊은 양반들 사이에 개화사상이 퍼지면서 하나의 세력이 형성되었고, 그 중 김옥균 등의 무리가 청 세력을 몰아내고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1884년 12월 4일 우정국에서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신정권을 수립하지만 청군의 공격에 의해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고합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우정국 옛터는 현재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고합니다.
1895년 5월 삼국간섭이후 조선에서의 일본의 위신이 급격히 추락하자 일본은 그 배경에 명성황후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는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사변)의 발단이 되어 1895년 10월 8일 일본군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머무는 건청궁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살해하였습니다. 명성황후 시해로 인해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은 범인인 미우라 공사 등을 구금하지만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석방해 버렸고,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인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궁녀들이 타는 가마에 몸을 숨기고 정동에 있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데 이것이 아관파천입니다.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알리기 위해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고 대한제국 초대 황제로 즉위합니다. 근대국가로 가기 위해 교육과 산업을 육성하고 전기·전차·전화·철도 등 근대문명을 활발히 도입하면서 서울시민들의 생활을 많이 바꾸어 놓지만 일본 등 외국 세력의 간섭이 심하여 근대국가 수립까지는 나가지 못했다고합니다.
자주독립국이 되기 위한 조선의 염원은 서울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서울 사직터널 밖의 독립공원입니다. 그 곳에는 독립문과 독립관, 서재필 동상이 있다. 독립협회를 만든 서재필은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을 부수고 독립문을 세우고 최초의 한글신문 <독립신문>을 창간했습니다.
서울에서 처음 전차가 운행된 것은 1899년으로 빠르고 편리한 기능 탓에 도시교통수단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고합니다. 1900년 한강철교가 가설된 후 철도는 전국으로 뻗어 나갔고 1930년대 말에는 한반도 내륙 산간지역까지 철도망이 확대되었다고합니다. 철도의 도입으로 보름이 걸리던 서울과 부산이 하루면 갈 수 있었고, 남녀노소가 몸을 맞대고 앉아 담소를 나누는 평등사회를 만들었지만 이러한 문명의 이기들은 대부분 제국주의 열강들이 대한제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들어온 것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을 돕는 역할을 했다고합니다.

 

덕수궁 근처 골목길 안쪽으로 가면 1900년 러시아 건축가가 지은 최초의 서양식 2층 벽돌 건물인 중명전이 있습니다. 중명전은 1905년 11월 대한제국이 일본제국과 을사늑약(을사조약)을 맺은 곳 입니다. 황제의 옥쇄도 날인되지 않고 무력으로 맺은 조약에 반발해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이란 사설로 협약의 부당함을 토로했고 민영환은 협약에 항거하여 자살하고 안중근 의 사가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등 전국 각처에서 반일 여론이 확산되고 일본을 처단하려는 의병투쟁이 크게 번져갔다고합니다.

 

일본이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한 후 일본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서울의 인구밀도가 높아졌고, 조선총독부는 일본인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살던 남대문로와 을지로, 충무로 일대를 중심으로 서 울의 도로와 구역을 개수하였지만 한국인이 다수 거주하는 종로 북쪽은 개발을 진행하지 않았다고합니다. 또한 일본은 식민 통치 권력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서울 곳곳에 서양식 건물을 건설하고 전시 공업화를 위해 용산과 영등포 일대에 중화학공장을 대거 건설했다고합니다.

 

서울에 일본인 거주자와 기업가가 늘어나면서 지금의 명동에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지점이 1906년 열렸고 1920년대에는 죠지아 백화점, 미나카이백화점 등이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 집중적으로 들어섰습니다. 조선시대 육의전이 밀집해 있던 종로에는 한국인 최초로 박흥식이 1931년 화신백화점을 열었고, 1934년에는 전국에 체인점을 개설하고 37년에는 지하 1층에서 6층까지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초현대식 건물로 변신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고합니다. 경성의 변화에 따라 서울시민들의 생활 모습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북촌에는 전통 한옥 대신 문간방과 사랑방이 없어진 개량 한옥이 늘어났고 커피나 맥주를 파는 카페, 케익이나 카스테라 같은 고급빵을 파는 곳도 등장했고 거리에는 국화빵이나 중국식 호떡을 파는 곳도 생겼습니다. 전기도 일반 가정으로 보급되었고 1910년대에는 가로등이 켜질 정도로 전기 사용이 일상화 되었지만 이는 일부 지역에 국한된 것으로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은 1930년대까지도 밤에 호롱불을 밝히고 장작으로 취사와 난방 연료를 대체했다. 1920년대 들어서는 전차가 대중교통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9인용 승합택시도 등장했다고합니다.

 

대한제국을 패멸한 후 일본은 동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는 등 조선의 흔적을 없애기 시작했는데, 특히 궁궐을 많이 파괴했습니다. 경복궁이 첫 번째 대상으로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는 명 목 하에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을 헐고 부지를 파헤쳤습니다. 1929년에는 다시 대규모 조선박람회를 개최하면서 건청궁 등의 전각을 다수 헐었고, 박람회가 끝난 후에는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 를 건립했습니다. 경복궁의 훼손 뿐 아니라 창덕궁을 통감부 간부와 친일 인사들의 연회장으로 바꾸면서 주변 전각을 허물었고, 창경궁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바꾸었다고합니다.

 

일본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졌고 이는 한반도 전체와 만주 및 미주 한인사회로까지 확산되었습니다. 3·1운동은 나라 안팎에서 전개되는 항 일민족 운동의 촉매 역할을 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게 했다. 하지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1907년 건립된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고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서울은 독립운동과 민족운 동이 끊이지 않았던 곳으로 의열단원 김익상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기도 하고 김상옥이 종로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암살과 파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의열단은 향후 군대를 창설해 항일독립전쟁을 벌이는 방향으로 노선을 수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서울 시청 홈페이지 내용을 발췌한 것으로, 더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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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서울의 이름은 남경이었다고 합니다. 신라를 귀속시키고 후백제를 정복하여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고구려의 후계자란 뜻으로 ‘고려’ 란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고, 당시 서울은 ‘양주’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지만 편리한 교통과 풍부한 물산 등 유리한 자연지리적 여건 때문에 1067년 고려 제방 제도상 최고 지위 중 하나인 ‘남경’ 으로 승격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다시 양주로 격하되었다가 남경으로 격상되는 변화를 겪었지만 1101년 이후부터 고려말까지는 남경으로 승격되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려말 공양왕 당시, 왕조가 혼란스러워지자 난세를 타계하기 위해 당시 ‘한양’이라 불렸던 서울로 수도를 이전하지만 정치상황이 더 불안해지는 바람에 6개월 만에 개경으로 다시 수도를 이전하는 혼란을 겪었지만,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한양을 수도로 지목하면서 서울은 조선의 수도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 7월 조선을 창건하고, 1394년 한양을 조선의 수도로 확정하였다고 합니다. 1395년 경복궁과 종묘·사직단이 준공되고 1405년 창덕궁이 낙성되면서 한양을 중심으로 한 실질적인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가 시작된다고합니다. 조선은 수도 한양을 보호하기 위해 백악(북악산), 낙산, 목멱산(남산), 인왕산을 따라 약 18킬로 미터의 성곽을 쌓았고, 왕의 생활공간이자 통치공간인 궁궐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을 지었습니다. 이 곳을 조선의 5대궁이라 하며 조선의 왕이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은 창덕궁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통치기구는 의정부·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를 비롯한 육조와 사헌부·사간원 등의 특수기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늘날 광화문 앞 세종로에 육조가 모여 있었고, 이를 육조 거리로 불렸다고합니다. 오늘날의 국립대학으로 볼 수 있는 최고 학부인 성균관과 중등교육 기관으로 볼 수 있는 4부 학당도 사대문 안에 위치하는 등 서울은 명실공히 조선 정치·행정의 중심이었다고합니다. 현재 우리나라 사적 제125호 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에서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고 매년 제례를 지냈고 광화문 서쪽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사직단에서 곡물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사직제를 매년 거행했다고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을 북촌, 남쪽을 남촌이라 불렀다고합니다. 북촌은 종로구 가회동 일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양반 관료들이 모여 살았고 남촌은 중구 필동을 중심으로 가난한 선비들과 서민들이 모여 살았다고합니다. 그 중간에 종로가 있는데 종로에 상인들이 장사를 하는 시전이 위치해 있어서 도성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지금 서울의 중심인 한강은 전국에서 거둔 세금을 서울로 운송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급한 소식을 알려야 할 때는 남산 봉수에 연기를 피워 소식을 전했다고합니다. 지리적으로 동아시아 중심에 위치한 탓에 조선은 동북아시아 각국과 긴밀한 대외관계를 유지했고, 이에 따라 서울에는 각국의 외교 공간들이 있었다고합니다. 중국 사신들이 머문 곳은 태평관과 모화관이었고 일본과 남방국가 사신들은 동평관, 만주 여진족은 북평관에서 머물렀다고합니다.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7년간의 조일전쟁(임진왜란)은 조선에 큰 전쟁의 상흔을 남겼는데,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탔고 사대문내 백성들의 민가 70~80퍼센트가 불타 없어지는 등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매우 컸습니다. 뒤이어 1624년 이괄의 난,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면서 서울은 많은 피해를 겪었고, 도성 안은 청군의 노략질로 텅텅 비게 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은 흩어진 민심을 바로잡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가장 먼저 군사제도를 개편하고 도성을 보수했다고합니다. 숙종 때에는 도성의 무너진 부분을 수축하고 북한산성을 축조하는 등 도성의 방위 체계를 보다 확실하게 수립 하였다고합니다. 한편 조선 왕실은 전쟁으로 불탄 경복궁 대신 창덕궁과 창경궁을 먼저 재건했고 조선 후기 왕들은 창덕궁과 경덕궁을 오가며 생활하게 되었다고합니다.

 

조선 후기가 되면 종로 중심인 시전상인에서 벗어나 중구 청계천변 일대, 동대문 이현과 남대문 칠패 시장까지 상업지역이 확대되었다고합니다. 또한 한강의 용산·마포·서강·송파 등 포구를 중심으로 한 경강상인들의 활약도 두드러져, 조선 초부터 정치·경제의 중심이었던 서울은 전국 최대의 수공업 단지이기도 했다고합니다. 수공업단지는 주로 종로구와 중구 일대에 집중해 있었는데 종로구에는 왕실 의복을 만들던 상의원과 음식과 음식 담는 그릇을 만들던 사옹원이 있었고 창의문 밖에는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 등이 있었다고합니다. 이러한 수공업의 영역이 조선 후기에는 도성 밖으로 확대되면서 조선 경제를 활성화하고 서울이 조선 후기 상공업도시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새롭고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하는 실학이 젊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고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파가 탄생하게 되는데, 실학의 대두로 인해 서양의 과학기술이 조선에 들어왔고 천주교 사상이 함께 전파되기도 했다고합니다. 초기 천주교는 학문적 차원에서 연구되다가 차츰 신앙으로 발전했으나 성리학적 세계관을 부정하는 교리 때문에 결국 박해를 받았고 현재 양화대교 옆 잠두봉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가 처형되었다고합니다.

 

조선 후기에 크게 변했던 또 하나는 신분 체계였는데, 산업 활동이 다변화되고 경제생활이 진전되면서 사회계층 간 신분 이동과 신분 분화가 활발해지면서 농민이 양반으로 승격되는 일이 빈번 해지고 노비 해방이 본격화 되었다고합니다. 급변하는 시대상황에 따라 문학과 예술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는데, 문학으로는 정치부패와 사회 모순을 비판하는 허균의 홍길동전, 작자미상의 전우치전, 사실적인 언어표현을 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이 발표되었고, 그림으로는 우리나라 산천을 그대로 그리는 진경산수화 화풍이 유행했다고합니다. 일반 서민들의 생활풍속이나 여인들의 생활상을 그린 풍속화도 크게 유행했는데 대표적인 풍속화가로는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을 들 수 있습니다.

 

서울 시청 홈페이지 내용을 발췌한 것으로, 더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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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며 과거 백제, 주손의 수도로 시대에 따라 위례성, 한산, 한성, 한양, 양주, 남경, 경성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암사동 선사주거지를 통해 알 수 있듯 서울은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고, 삼국시대, 고려, 조선을 거쳐 약 2000년의 역사를 지닌 곳입니다.

 

선사시대란 문자로 기로되기 이전의 시대로 구석기, 신석기 시대가 이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한강 유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로 강남구 삼성동 50번지 일대에서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 등 구석기 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며 살았떤 것은 신석기 시대이며, 신석기 시대 유적은 서울 곳곳에서 발굴되었는데 이중 대표적인 것이 강동구 암사동 유적입니다.

 

청동기 시대는 본격적인 농경기 문화가 시작되는 때로 강남구, 강동구, 송파구 등에서 청동기시대 집터가 발굴되고 한강 유역에서는 청동기 시대에 널리 사용되던 민무늬 토기인 가락동식 토기가 발굴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한강유역에는 청동기 시대 무덤인 고인돌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계급사회가 성립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이러한 정치적 집단이 이후 백제 건국에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고 합니다.

 

개원전 18년, 백제는 위례성을 수도로 하여 나라를 세웠습니다. 송파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가 위례성이 위치했던 곳으로 위례성은 후에 큰 성이란 뜻인 한성 혹은 대성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렸고, 왕이 거주하던 곳이란 뜻으로 왕성이라고도 불렸다고 합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에 의해 한성이 무너지면서 백제가 공주로 수도를 옮기게 되지만 493년간 백제의 수도였던 탓에 서울 곳곳에서 백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송파구 풍납토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합니다. 송파구 석촌동, 가락동, 방이동에 가면 실제 백제 고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 근방을 중심으로 백제인들이 사용한 토기, 기와, 농기구, 유리 제작에 쓰인 거푸집 등 다양한 백제의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475년 백제에게 한성을 뺏은 고구려는 사령부를 몽촌토성에 두고 한강 건너편 아차산에 보루를 설치해 적은 칩입에 대비하였다고 합니다. 몽촌토성에는 백제의 유물 뿐 아니라 고구려 사람들이 사용한 토기와 와당 등도 발견되었고 고구려 사람들이 설치한 보루를 아차산, 망우산, 수락산 등지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후 고구려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다툼과 돌궐의 침략으로 힘이 약해졌고, 551년 신라, 가야, 백제의 연합군에 밀려 76년간 차지했던 한성에서 쫒겨나 북쪽으로 물러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성을 차지해 중국과 직접 교류하고 싶었던 실라는 다시 고구려와 협약을 맺고 백제를 무너뜨려 554년에 신라가 한강 유역을 완전히 확보하게 되었고, 신라의 진흥왕은 한성 지역이 신라의 영토임을 공고히 하기 위해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이것이 북한산진흥왕순수비입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서울을 지배했던 탓에 서울에는 신라의 유물이 많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북한산진흥왕순수비 뿐 아니라, 보물 제 235호인 장의사 당간지주, 다양한 신라 고분 등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서울과 가까운 광주 남한산성, 하남시 이성산성에도 신라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의 문화 유산이 모두 발견된 곳은 서울 지역 뿐으로 이것이 고대 서울 역사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서울 시청 홈페이지 내용을 발췌한 것으로, 더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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