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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는 동북아시아에 길게 뻗은 한반도의 서부중앙지역으로 동경 126도와 127도, 북위 36도와 38도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면적은 전 국토의 10%를 차지하며 북쪽으로는 86km의 휴전선에 서쪽으로는 332km의 해안선에 접해있으며, 동쪽으로는 강원도, 남쪽으로는 충청도와 인접해 있고 그 중앙에는 서울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한강에 의해 남,북지역으로 나뉘어져서 한수이북은 산간지역, 한수 이남지역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습니다. 경기도의 땅 모양은 광주산맥과 차령산맥이 동쪽에서 뻗어와 차츰 낮아지는 모습이고 서쪽은 김포, 경기, 평택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부터 동쪽땅이 높고 서쪽땅이 낮은땅(경동지형)이라 했다고 합니다.

 

경기도의 기후는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이가 심한 대륙성 기후로서 연평균 기온은 11~13도로서 북동부 산악지대가 낮고 남서쪽 해안지역이 약간 높습니다. 1월 평균기온은 경기만 일대가 영하 4도, 남한강 유역이 영하 4~6도이고 북한강과 임진강 유역이 영하 6~8도로 해안에서 내륙으로 갈수록 한랭하고 기온차가 커집니다. 여름은 겨울보다 지역차가 적으며 내륙지방이 경기만 일대보다 높아 가장 더운 곳은 평택으로 8월 평균기온이 26.5도라고 합니다.

연평균 강수량은 1,100mm 내외로 비의 양이 많다고 합니다. 북동부 내륙지방인 북한강 유역과 임진강 상류는 강수량이 1,300~1,400mm나 되지만 해안지방 강수량은 900mm 정도 된다고 합니다.

 

경기도의 지형은 대체로 추가령 구조곡을 경계로 북부산지와 남부산지로 나누어지는데, 북부는 중국 요동방향의 마식령산맥, 남부는 중국방향의 광주 산맥과 차령산맥이 각각 그 골간을 이루고 있으며, 서쪽 해안에 가까워질수록 고도가 낮아져 평야나 구릉성 산지로 바뀐다고 합니다.

경기도내에 분포하는 주요 산들은 광주산맥에 속하는데, 내륙쪽의 명지산, 국망봉, 광덕산, 용문산 등이 1,000m를 넘고, 도봉산, 관악산 등이 700m 내외의 고도를 가지며, 화강암지대에 발달된 이 산들은 화강암의 박리작용의 결과로 기암절벽이 많고 계곡이 깊어 예로부터 명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산수도권지역에서 등산인들이 즐겨찾는 산으로는 포천시 일동면, 가평군 하면에 있는 청계산 849m, 동두천에 있는 소요산 587m, 가평균 설악면과 양평군 옥천면의 경계로 이루는 유명산 864m, 남양주시의 운길산 610m, 의정부시의 수락산 638m 등도 경관이 뛰어난 수도권 지역의 명산입니다.

 

주요 하천은 한강, 임진강, 안성천 등이며 대부분이 한강유역에 속한다고 합니다. 한강은 514km로 우리나라에서 네번째로 긴 강이며, 그 유역 면적은 압록강에 이어 전국 제 2위라고 합니다. 한강은 금강산 부근에서 발원하는 북한강 수계와 오대산 부근에서 발원하는 남한강 수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북한강은 소양강, 홍천강, 청평강 등의 지류를 합치면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평창강, 옥동강, 달천, 청미천, 섬강, 복하천 등의 지류로 합쳐지며, 서북쪽으로 돌아 흘러오는 남한강과 양수리 근처에서 합류하여 한강의 본류를 이룬 뒤 강화도의 북쪽을 돌아 경기만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임진강은 마식령산맥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한탕강, 영평천, 사미천, 문산천 등의 지류를 모아 김포 부근에서 한강과 만납니다. 안성천은 길이 76km의 짧은 하천에 불과하지만 한천, 진위천 등과 합류하여 아산만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그 유역에 넓고 비옥한 안성평야를 발달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경기도청 홈페이지 내용을 발췌한 것으로, 더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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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서울은 식민지 수도 경성에서 대한민국 수도 서울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38선을 경계로 미국군과 소련군이 각각 진주하게 되고 두 연합군이 신탁통치안을 제안하면서 반대하는 우파와 찬성하는 좌파간의 대립이 격렬해졌고, 대표적인 정치지도자로는 이승만과 김구를 들 수 있다. 이화장에서 기거하던 이승만은 1948년 7월 20일 제헌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민족운동가 김구는 경교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분단 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에 열정을 불살랐지만 안두희에 의해 시해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은 다시 폐허가 되고 말았는데, 전쟁 동안 150만 서울 시민 중 110만 명 이상이 서울을 떠났다가 돌아왔을 정도로 서울의 피해는 막심했습니다. 1953년 9월 전 쟁이 끝난 후에야 새로운 도시 건설에 주력할 수 있었고, 제분·제당·방적 등 원조 물자를 이용한 제조업이 제일 먼저 재생되었습니다.

 

경성시에서 서울시로 명칭이 공식적으로 바뀐 것은 미군정이 <서울시헌장>을 발표하고 한달이 지난 1946년 9월 28일이며 1949년에는 서울특별시로 전환되고 1962년부터 서울시는 국무총리 직속의 행정기구가 되었습니다. 초대 정권인 이승만 정권은 시간이 지날수록 독재정치로 변질되었고,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를 저질렀고,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과 시민들에게 경찰이 총격을 가하면서 시민의 분노가 전국적으로 폭발하였고,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부정선거와 경찰의 폭력에 반발하면서 정권의 퇴진을 요구한 4·19혁명 의 성공으로 대한민국에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1961년 박정희 정부 이후 70년대 말까지 연평균 9퍼센트라는 경이로운 경제성장을 이루며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들었습니다. 서울의 면적도 지속적으로 확장되는데 1963년 양주군·광주군·시흥군·김포군·부천군 일부가 서울시로 편입되었고, 1973년 약 605제곱킬로미터로 확장되었습니다. 서울에 지하철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74년 8월 15일로 서울-수원, 서울-인천, 용산-성북, 서울-청량리 총 98.7킬로미터에 달하는 구간이었고, 이것이 지금 말하는 지하철 1호선에 해당합니다. 한적한 농촌지역이었던 강남은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었고 강남개발의 필요성에 따라 1969년 말부터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1970년대 서울시정의 최대과제는 ‘강북인구집중억제’ 정책 이었고 이에 따라 영동지구 개발이 가속화, 강남개발촉진이 진행되었습니다. 강북에 있던 유서 깊은 고등학교를 대부분 강남으로 이전시켰는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강남으로 이전하였고 강남이 교육의 메카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서울과 대한민국의 발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86서울아시안게임 개최, ’88서울올림픽 개최입니다. 남북 분단 상황 등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대회를 성황리에 마무리했으며 1970년 대 이후 고도성장으로 격상된 지위를 전 세계에 뽐낼 수 있었습니다. 특히 88올림픽은 서울과 일본의 나고야가 경합을 벌인 끝에 52:27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개최국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2002년 한국과 일본이 제 12회 월드컵 경기를 공동으로 개최하면서 전 세계의 시선은 다시 서울로 쏠리게 되었습니다. 한국은 세계 강호인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물리치고 4강에 진출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고 ‘붉은악마’응원단의 열광적인 응원이 세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서울의 변화를 크게 보여주는 것은 청계천입니다. 1760년에 원형이 완성된 청계천은 남촌과 북촌을 구분하는 경계선이자 서민들의 생활터전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는 대륙 침략 수송로로 활용하기 위해 세종로사거리에서 무교동까지 청계천을 복개했고, 광복과 6·25 등의 혼란을 거치면서 청계천은 방치되었습니다. 쓰레기와 오물이 청계천에 쌓여가자 서울시는 복개를 결정하고 광교에서 신답철교까지 순차적인 복개를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이 더욱 발전하자 개발과 성장보다는 문화와 환경에 더 큰 가치를 두게 되었고 2003년 7월부터 복개된 도로를 걷어내고 청계천을 복원하는 공사를 진행한 끝에 2005년 10월 1일 청계천이 정식 복원되었습니다.

 

서울의 인구는 1950년 160만명에서 2008년 1,042만여 명으로 늘어났지만 세대당 인구는 5명에서 2.6명으로 줄었습니다. 광복 직후 서울에서 제일 높은 건물은 8층짜리 반도호텔이었지만 지금은 30층 이상의 고층 건물이 숲을 이루고, 광복 직후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는 한강대교가 유일 했지만 현재는 25개의 교량이 건설되어 있는 등 서울은 한국의 발전과 더불어 크게 달라져 있습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동대문시장이나 남대문 시장 같은 재래시장에서 상품을 구입했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백화점 이용이 급증 했습니다. 1990년대 이후 인터넷 시대가 도래 하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상상을 초월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21세기는 국가대 국가 보다는 도시 대 도시의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입니다. 이에 따라 서울은 동북아시아의 중심도시가 되기 위해 국제금융 및 비즈니스 산업, 정보통신, 디지털 콘텐츠, 패션산 업, 바이오산업을 5대 전략산업으로 정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살기 좋은 환경도시를 위해 계속 진화하고 있으며 2005년 6월에는 115만여 제곱미터에 달하는 넓은 공원, 서울숲이 개장하였습니다.
2004년 7월 1일, 서울시는 대대적인 교통체계 개편을 시행하였고, 과감한 중앙버스전용차로 설치와 함께 전차·버스 연계 수송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대중교통 요금 부담을 대폭 줄였습니다. 또한 간선노선과 지선노선 이원체계로 정립하고 중앙버스전용차로를 이용해 신속성을 확보함으로써 과포화된 서울의 교통상황을 효과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현재 서울시는 어느 정도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 판단되는 바, 21세기에는 문화·환경·복지·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일류도시가 되는 것을 서울시의 비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서울시가 추구하는 일류도시란 사람 향기가 가득한 따뜻한 도시, 자연을 닮은 쾌적하고 편안한 녹색도시, 세계를 담는 활기찬 도시, 유구한 역사문화 도시를 일컫는 것으로 서울시가 추진하는 다양한 프로젝 트가 완성되면 서울은 세계적인 브랜드 가치를 지닌 일류도시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서울 시청 홈페이지 내용을 발췌한 것으로, 더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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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후 270년이나 방치되어 있던 경복궁은 1868년에야 중건되었는데, 경복궁 중건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오랜 세도정치로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진행했던 것이라고합니다.
조선을 향한 서구 열강의 끈질긴 개항 요구와 침입이 있었고, 조선은 프랑스군과 미국군이 침입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격퇴하기도 했지만 결국 1876년 부산·인천·원산 등의 항구를 개방했고 서구 열강과 조약을 맺었다고합니다. 당시 조약 내용을 보면 관세 주권에 제한을 두는 등 불평등한 내용이 많았다고합니다. 이에 따라 조선의 상권이 외국 상인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일이 많아지고 일반 서민의 생활이 곤궁해졌다고합니다. 일본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승리하고 대한제국의 금융과 재정을 장악하면서 조선 상인들의 몰락이 가속화 됐지만 국채보상운동, 식산흥업운동, 근대교육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조선의 상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끊이지 않았다고합니다.

 

1870년대 중반 무렵 한성의 젊은 양반들 사이에 개화사상이 퍼지면서 하나의 세력이 형성되었고, 그 중 김옥균 등의 무리가 청 세력을 몰아내고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1884년 12월 4일 우정국에서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신정권을 수립하지만 청군의 공격에 의해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고합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우정국 옛터는 현재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고합니다.
1895년 5월 삼국간섭이후 조선에서의 일본의 위신이 급격히 추락하자 일본은 그 배경에 명성황후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는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사변)의 발단이 되어 1895년 10월 8일 일본군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머무는 건청궁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살해하였습니다. 명성황후 시해로 인해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은 범인인 미우라 공사 등을 구금하지만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석방해 버렸고,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인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궁녀들이 타는 가마에 몸을 숨기고 정동에 있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데 이것이 아관파천입니다.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알리기 위해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고 대한제국 초대 황제로 즉위합니다. 근대국가로 가기 위해 교육과 산업을 육성하고 전기·전차·전화·철도 등 근대문명을 활발히 도입하면서 서울시민들의 생활을 많이 바꾸어 놓지만 일본 등 외국 세력의 간섭이 심하여 근대국가 수립까지는 나가지 못했다고합니다.
자주독립국이 되기 위한 조선의 염원은 서울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서울 사직터널 밖의 독립공원입니다. 그 곳에는 독립문과 독립관, 서재필 동상이 있다. 독립협회를 만든 서재필은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을 부수고 독립문을 세우고 최초의 한글신문 <독립신문>을 창간했습니다.
서울에서 처음 전차가 운행된 것은 1899년으로 빠르고 편리한 기능 탓에 도시교통수단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고합니다. 1900년 한강철교가 가설된 후 철도는 전국으로 뻗어 나갔고 1930년대 말에는 한반도 내륙 산간지역까지 철도망이 확대되었다고합니다. 철도의 도입으로 보름이 걸리던 서울과 부산이 하루면 갈 수 있었고, 남녀노소가 몸을 맞대고 앉아 담소를 나누는 평등사회를 만들었지만 이러한 문명의 이기들은 대부분 제국주의 열강들이 대한제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들어온 것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을 돕는 역할을 했다고합니다.

 

덕수궁 근처 골목길 안쪽으로 가면 1900년 러시아 건축가가 지은 최초의 서양식 2층 벽돌 건물인 중명전이 있습니다. 중명전은 1905년 11월 대한제국이 일본제국과 을사늑약(을사조약)을 맺은 곳 입니다. 황제의 옥쇄도 날인되지 않고 무력으로 맺은 조약에 반발해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이란 사설로 협약의 부당함을 토로했고 민영환은 협약에 항거하여 자살하고 안중근 의 사가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등 전국 각처에서 반일 여론이 확산되고 일본을 처단하려는 의병투쟁이 크게 번져갔다고합니다.

 

일본이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한 후 일본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서울의 인구밀도가 높아졌고, 조선총독부는 일본인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살던 남대문로와 을지로, 충무로 일대를 중심으로 서 울의 도로와 구역을 개수하였지만 한국인이 다수 거주하는 종로 북쪽은 개발을 진행하지 않았다고합니다. 또한 일본은 식민 통치 권력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서울 곳곳에 서양식 건물을 건설하고 전시 공업화를 위해 용산과 영등포 일대에 중화학공장을 대거 건설했다고합니다.

 

서울에 일본인 거주자와 기업가가 늘어나면서 지금의 명동에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지점이 1906년 열렸고 1920년대에는 죠지아 백화점, 미나카이백화점 등이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 집중적으로 들어섰습니다. 조선시대 육의전이 밀집해 있던 종로에는 한국인 최초로 박흥식이 1931년 화신백화점을 열었고, 1934년에는 전국에 체인점을 개설하고 37년에는 지하 1층에서 6층까지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초현대식 건물로 변신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고합니다. 경성의 변화에 따라 서울시민들의 생활 모습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북촌에는 전통 한옥 대신 문간방과 사랑방이 없어진 개량 한옥이 늘어났고 커피나 맥주를 파는 카페, 케익이나 카스테라 같은 고급빵을 파는 곳도 등장했고 거리에는 국화빵이나 중국식 호떡을 파는 곳도 생겼습니다. 전기도 일반 가정으로 보급되었고 1910년대에는 가로등이 켜질 정도로 전기 사용이 일상화 되었지만 이는 일부 지역에 국한된 것으로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은 1930년대까지도 밤에 호롱불을 밝히고 장작으로 취사와 난방 연료를 대체했다. 1920년대 들어서는 전차가 대중교통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9인용 승합택시도 등장했다고합니다.

 

대한제국을 패멸한 후 일본은 동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는 등 조선의 흔적을 없애기 시작했는데, 특히 궁궐을 많이 파괴했습니다. 경복궁이 첫 번째 대상으로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는 명 목 하에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을 헐고 부지를 파헤쳤습니다. 1929년에는 다시 대규모 조선박람회를 개최하면서 건청궁 등의 전각을 다수 헐었고, 박람회가 끝난 후에는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 를 건립했습니다. 경복궁의 훼손 뿐 아니라 창덕궁을 통감부 간부와 친일 인사들의 연회장으로 바꾸면서 주변 전각을 허물었고, 창경궁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바꾸었다고합니다.

 

일본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졌고 이는 한반도 전체와 만주 및 미주 한인사회로까지 확산되었습니다. 3·1운동은 나라 안팎에서 전개되는 항 일민족 운동의 촉매 역할을 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게 했다. 하지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1907년 건립된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고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서울은 독립운동과 민족운 동이 끊이지 않았던 곳으로 의열단원 김익상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기도 하고 김상옥이 종로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암살과 파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의열단은 향후 군대를 창설해 항일독립전쟁을 벌이는 방향으로 노선을 수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서울 시청 홈페이지 내용을 발췌한 것으로, 더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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